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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제2032호 (2019.11.06~2019.11.12일자) 기사 서울 서촌의 20평 남짓한 한옥에 사는 30대 부부의 이야기. 어떻게 하면 이 도시에서 버티거나 떠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사진가 남편과 작가 아내는 그 방법을 집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찾고자 했다. 운 좋게 세 들어 살게 된 한옥은 두 부부에게 계절마다 새로운 할 일과 영감을 줬단다. 두 사람은 직접 고친 집에서 올린 작은 결혼식, 옥상에 채소를 심어 가꾸며 사는 이야기, 식탁 사이로 펼쳐진 미장센에 매료된 이야기 등 일상의 음식과 자연스러운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부부는 한옥에 살면서 철마다 새로운 할 일과 영감을 찾고 계절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환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8년간 살며 절기를 맞이하는 나름의 루틴도 생겼다. 경칩에는 흙을 고르고, 곡우에는..
올리브 매거진_2019년 11월 이슈_음식과 인문학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경상도, 그것도 소백산 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내륙 지방답게 어려서부터 특별한 음식이라 하면 소금에 절인 짠 내 나는 간고등어가 전부인 줄로만 알고 지냈다. 그것도 선도 좋은 생선구이가 아니라 소금에 푹 절인 간고등어에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얹은 찜 요리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 연초의 음력설이 찾아들 무렵이면 큰집 정짓간의 온돌방과 이어진 가마솥에는 핏기가 시뻘건 큼지막한 소고기 서너 덩이가 놓였다. 나박 모양으로 투박하게 조각 낸 무와 가을의 끝자락에 거두어들인 토란대도 함께. 투명하게 빛나는 지하수에 풍덩 담긴 고기와 채소는 아궁이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에 뜨겁게 끓어올랐다. 따스한 온기에 이끌려 장작불 앞에 모여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 앞..
WEE MAGAZINE, 창간호
여성중앙, 2016년 11월 이슈 여자의 방 : 여자만의 시간 "500파운드와 자신만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자유를 누리는 습관과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때 기회는 찾아올 것입니다." 일찍이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자신만의 방을 갖기를 주장했다. 그녀에게 방은 그저 물리적인 공간 이상의 것, 여자만의 시간, 여자만의 일, 여자만의 꿈이었다. 에디터 조한별 사진 전택수
양고기 스튜 겨울의 양고기 스튜 내추럴 와인 을 곁들인 페어링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해 갈무리 해 둔 비황 작물과 겨울철 한기를 피해 땅 속의 양분을 한껏 품은 제철 뿌리채소를 뜨거운 솥에 끓인 스튜는 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는 위로의 묘약입니다. 물론, 좋아하는 고기와 건조한 태양빛에 말려둔 허브를 스튜에 녹이는 건 각자의 비법이겠지만요. 아! 여기서 저만의 비법을 얘기하자면, 완성된 스튜와 함께 페어링 할 와인을 살짝 스튜에 넣어 끓이는 거예요. 가을에 한창 수확한 포도를 첨가해 졸여둔 글레이즈드 발사믹도 함께요 Lestignac의 와인은 내추럴 와인의 매력이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재배와 수확 과정에서 농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일 말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조하는 와이너리의 풍경은 왠지 오랜 풍속화를 떠..
미셸을 위한 시 아메리칸 숏헤어는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털이 짧은 고양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 고양이들의 역사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고-베스부치의 오해와 우연으로 빚어진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올 때 함께 데려온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에 도처에 존재하였을 고양이들이지만, 짧은 털을 가진 짙은 얼룩무늬의 고양이가 '아메리칸 숏헤어'라는 이름을 명명받기 까지는 대서양을 뚫고 수천 마일을 건너와 작은 네 발로 미지의 땅을 디딘 최초 아메리칸 숏헤어의 노고가 있을 것이다. 2011년 3월 즈음, 미셸은 세단을 타고 전 주인의 품에 안겨 이곳 한옥집으로 이사를 왔다. 화장실과 사료그릇으로 쓰던 락앤락 반찬통, 곰돌이가 그려진 물그릇, 그리고 두툼한 갈색 발수건 한 장을 갖고서(미셸이 이..
서울, 종로 종로는 김수영 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찬란한 도읍의 중심, 광화문에서 사대문의 동녘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흥인지문에 이르기까지의 바로 그 거리. 그는 시 '거대한 뿌리'에서 서울에서 나고 자라며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뿌리로 형상화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은 시인 만의 자조적이며 냉소적인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수한 반동분자'들이 활개 치는 서울의 모습이었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와 같은 반동분자들은 더 이상 이 거리 속에 없다. 그들이 활보하던 광화문 앞으로 펼쳐진 육조六曺 거리는 지하 속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서울의 중추라고도..
하지, 여름에 이르다 좀처럼 서산으로 저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태양이 지상에 14시간 이상이나 머물게 되는 이 시기가 오면 비로소 여름을 피부로 만끽하는가 싶다. 굳이 달력을 뒤적여가며 절기를 구분 짓지 않아도 이 세계의 단서들은 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지금의 때를 어김없이 지목하고 있다. 모내기, 가뭄, 기우제, 감자 수확 등. 하지를 전후하여 수확한 농작물로 여름의 밥상은 연일 풍요로우며, 다시 공터가 된 경작지로는 깨, 콩 등의 모종을 알뜰하게 심어 가을 추수를 기약한 뒤, 곧 닥칠 장마를 기다린다. 하지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봄철에 싱그럽게 피어올라 초여름의 기운을 함뿍 먹은 텃밭 식물들은, 어느덧 갈무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 포기 움켜쥐고 땅 속에서 흙덩이와 얼기설기 얽힌 뿌리를 흔들어 준 뒤, 과감하게 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