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종로는 김수영 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찬란한 도읍의 중심, 광화문에서 사대문의 동녘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흥인지문에 이르기까지의 바로 그 거리. 그는 시 '거대한 뿌리'에서 서울에서 나고 자라며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뿌리로 형상화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은 시인 만의 자조적이며 냉소적인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수한 반동분자'들이 활개 치는 서울의 모습이었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와 같은 반동분자들은 더 이상 이 거리 속에 없다. 그들이 활보하던 광화문 앞으로 펼쳐진 육조六曺 거리는 지하 속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서울의 중추라고도..
하지, 여름에 이르다
좀처럼 서산으로 저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태양이 지상에 14시간 이상이나 머물게 되는 이 시기가 오면 비로소 여름을 피부로 만끽하는가 싶다. 굳이 달력을 뒤적여가며 절기를 구분 짓지 않아도 이 세계의 단서들은 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지금의 때를 어김없이 지목하고 있다. 모내기, 가뭄, 기우제, 감자 수확 등. 하지를 전후하여 수확한 농작물로 여름의 밥상은 연일 풍요로우며, 다시 공터가 된 경작지로는 깨, 콩 등의 모종을 알뜰하게 심어 가을 추수를 기약한 뒤, 곧 닥칠 장마를 기다린다. 하지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봄철에 싱그럽게 피어올라 초여름의 기운을 함뿍 먹은 텃밭 식물들은, 어느덧 갈무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 포기 움켜쥐고 땅 속에서 흙덩이와 얼기설기 얽힌 뿌리를 흔들어 준 뒤, 과감하게 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