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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올리브 매거진_2019년 11월 이슈_음식과 인문학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경상도, 그것도 소백산 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내륙 지방답게 어려서부터 특별한 음식이라 하면 소금에 절인 짠 내 나는 간고등어가 전부인 줄로만 알고 지냈다. 그것도 선도 좋은 생선구이가 아니라 소금에 푹 절인 간고등어에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얹은 찜 요리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 연초의 음력설이 찾아들 무렵이면 큰집 정짓간의 온돌방과 이어진 가마솥에는 핏기가 시뻘건 큼지막한 소고기 서너 덩이가 놓였다. 나박 모양으로 투박하게 조각 낸 무와 가을의 끝자락에 거두어들인 토란대도 함께. 투명하게 빛나는 지하수에 풍덩 담긴 고기와 채소는 아궁이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에 뜨겁게 끓어올랐다. 따스한 온기에 이끌려 장작불 앞에 모여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가며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하곤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랜 시간 졸인 탕국은 제수상에 진상한 뒤 밥과 여러 찬, 과일과 떡, 술과 더불어 소반에 올랐다. 새해를 맞아 종갓집을 방문한 동성의 아저씨들과 윗대 어르신들은 반상 주변으로 둘러앉아 뜨끈한 탕국 한 그릇에 흰쌀밥 한 공기를 든든하게 비우며 아직 물러날 기색이 없는 동장군의 위세를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겼다. 성씨도 고향도 모두 상이한 부녀자들은 부엌에 둘러앉아 탕국 한 그릇씩을 겸한 산해진미를 한상에 두루두루 펼쳐놓고 만찬을 즐겼다. 그렇게 모두들 한겨울의 호사로운 탕반湯飯을 누렸던 것이다.

 

제사를 치른 뒤에 맛보는 탕국은 일찍 퍼 담은 것보다 훨씬 깊은 맛이 우러났다. 가마솥에서 타고 남은 숯의 잔열로 인해 더욱 뭉근하게 졸여진 까닭이다. 무와 토란대의 섬유질은 그 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장시간 조리한 고기 조직은 부드러운 젤리를 삼키듯 입 속으로 퍼져나갔다. 백태를 갈아 간수에 건져 갓 쪄낸 손두부의 담백한 맛은 중간중간 탕국의 맛을 중화시켜주었다. 고깃결 사이로 퍼진 지방질의 고소함과 혀를 휘감는 육즙, 완성 직전 가미된 국간장과 소금의 짠맛이 은근하게 스며든 뜨끈한 탕국 한 그릇의 맛이란. 그 맛의 기억은 새벽부터 바지런 떨며 일찌감치 시작된 지루하기 그지없는 새해 첫날의 풍경과 함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뜨끈한 탕국 한 그릇을 몸속으로 비워내는 일은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이었던 셈이다.

 

추운 겨울날, 영하의 기후가 반 이상 지속되는 척박한 환경에서 한정된 단백질이나 지방을 가장 효과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은 고깃국을 끓여 먹는 것이었다. 두툼한 한 덩이의 고기를 그 무게의 수십 배쯤 되는 물에 우려 적당한 농도의 육수로 밥과 함께 곁들여 먹는 것으로 말이다. 불교도 기독교도 천주교 신자도 아닌 집성촌의 마을 사람들은 무교無敎, 아니 유교儒敎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인간 본연에 내재된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지니고 말이다. 무언無言의 유교 강령이 수백 년 동안 뿌리를 내린 집성촌에서 뿌리 깊숙하게 내려온 탕반 문화는 공동체 사회를 이루며 공평한 먹거리를 추구했던 선인들의 가치 또한 깃들어 있는 것이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불현듯 스쳐간 입맛은 목청 끝에서 뭉근하게 잡아당기는 뜨끈한 고깃국의 고소한 향이다. 나는 올해도 잊지 않고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는 아버지에게 토란대를 말려달라고 주문했다. 굳이 일러두지 않아도 아버지는 이미 토란 줄기를 베어다가 예쁘게 줄 세워 매달아놓았을 것이다. 이따금씩 따듯한 고깃국 한 그릇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충동이 엄습한다. 그건 나도 모르게 내 속에 내재된 고깃국에 대한 과감한 애착이 뿌리 깊은 DNA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장보현은 학부에서 한국예술학을 전공했다. 옥상 정원이 있는 서울 도심의 작은 한옥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일상의 음식과 자연스러운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쓴다. 저서로는 <도시생활자의 식탁>, <지금 여기에 잘 살고 있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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