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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포르노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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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의 기록, 2020 지난해 이맘때 무렵, 나의 시간은 파리와 겐트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플랑드르의 풍경 속에서, 금호 강변의 흐드러진 들풀과 보릿고개를 조롱하며 하나둘씩 영글어가는 온갖 것들이 그리웠다. 꼬박 일 년을 기다린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밤, 하늘에서 별이 쏟아졌고 희미한 별무리 서너 개는 지평선까지 내려와 꽃이 진 복숭아 밭 잎새에 걸렸다. 다음날, 모든 것이 차오르기 시작한다는 소만이 시작되었고 유례없는 에메랄드 빛 하늘 사이로 조각구름이 춤을 췄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는 새벽에서 황혼까지 고된 노동을 이어가는 인간의 땀방울이 서려있다. 아버지는 사나흘 설익은 포도씨를 추려내고 나면, 한동안 흰쌀밥이 초록 알갱이로 보인다고 할 정도다. 이 땅에 묻힌 거대한 뿌리를 밟고 ..
<스마클릭, smakelijk!>_동화되어 공감하며 치유하다 ∽프롤로그∽ 그 어느 때와 다름 없던 2019년의 봄날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새벽녘을 헤매던 꿈 속의 산책이 아쉬워 침대맡을 부비적 거리던 습관은 34년째 지속중이고, 발끝으로 전해오는 고양이의 보드라운 온기는 8년째 알 수 없는 안도감을 준다. 나의 영원한 안식처, 이 요람을 박차고 부엌으로 나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 전 이 달콤한 시간을 조금만 더 유예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감싼다. SNS 체크, 밤 새 떠오른 이슈 확인 등등. 메세지가 도착했다. 겐트에 사는 Aejin Huys 님으로 부터. 곧 한국에 갈 예정인데, 책 작업을 위해 미팅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흔쾌히 "Yes".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겐트의 존재를 몰랐다. 겐트가 내 눈 앞에 펼쳐질 줄은 더더욱. 두어달 뒤 서촌..
파프리카 초밥 파프리카는 제가 편애하는 재료 중 하나입니다. 다이어트 식단에 늘 이름을 올리던 명성 덕분이겠죠. 실은 인생 최대치 몸무게를 갱신했을 때, 100% 현미밥과 닭가슴살, 브로콜리 그리고 파프리카만 먹고살았던 적이 있어요. 나 자신과의 꽤 지루한 싸움이었는데, 그땐 무슨 불꽃 의지가 샘솟았던지 기어이 다이어트에 성공하고야 말았죠. 약 2주간 지속된 다이어트로 5kg나 감량했던걸요. 7kg였나. 그때의 기억으로 '현미, 닭가슴살, 브로콜리, 파프리카'만 보면 회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솟아올라요. 물론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제 나이 때에 맞는 적정 체중을 유지 중이에요. 인바디 밸런스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어쨌건, 파프리카는 어느 요리에나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식재료임에는 틀림없답니다...
가을의 오브제 어느덧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에 접어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시기죠. 시골 들녘의 풍경은 추수를 마무리 짓고 월동 준비로 분주합니다. 쭉정이만 남은 나뭇가지가 쌓여가고, 황금빛 볏단은 새하얀 비닐 속에 돌돌 말린 채 마치 오브제 같이 논 한가운데서 겨울을 보내죠. 멀리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마시멜로 같거든요. 옥상 정원의 허브들도 계절의 변화를 하나둘씩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씨앗을 맺은 씨방은 건조한 가을의 대기 속에서 갈변해가고, 노랗고 붉게 그 잎을 물들여가죠. 생명력이 강한 토마토나 월동을 하는 허브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듯 꽃을 피우고 푸른 잎을 새로 틔어내기도 해요. 그래 봤자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기 전까지 유효한 이야기겠지만요. 씨앗을 가득 머금은 허브 줄기를 ..
발사믹을 곁들인 체리 콩포트 티라미수에 얹은 체리는 그야말로 정물화 같은 느낌이었다면, 체리에 알알이 맺힌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은 길게 유예할 수 있도록 콩포트를 졸이기로 했다. 칼로 체리 단면을 반으로 가르고, 씨앗을 도려 낸다. 방울토마토보다 더 작고 귀여운 3년생 체리 열매가 내후년에는 얼마나 더 차오를 것인지 괜스레 기대감을 안고서. 잼을 졸이는 일은 일상 다반사가 되었다. 제철 과일을 계절의 뒤안길로 보낼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행하던 부엌의 의식. 전자 계량기의 전원을 한 번 꾹 누르는 일은 왜 그토록 여전히 낯선 것일까. 익숙한 냄비의 부피와 손의 감각, 눈대중이 여전히 저울의 역할을 자처한다. 설탕과 발사믹, 레몬의 삼중주. 투명한 유리병을 끓는 물에 한 번 데쳐 병 속의 유효기간을 연장한다. 검붉은 체리 콩포트와 옥상에..
체리를 얹은 티라미수 두 해 전 아버지는 과수원 한 귀퉁이에 심심풀이 과실수를 심었다. 살구, 자두, 아로니아, 체리, 호두나무 각 한 그루씩. 이듬해, 여름의 문턱에서 결실을 맺은 살구 속으로 발그레한 여름이 가득 차 있었고 늦가을 열매를 맺은 추희는 겨우 서너 개가 달렸다나. 그 어떤 성분이 눈에 좋다며 유행 따라 심은 아로니아는 무섭게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지만 떫은맛 탓에 찬밥 신세다. 게 중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한 체리 묘목은 꼬박 3년 만에 탐스러운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지 무렵 제철을 맞은 체리를 맛 보여 주고 싶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왔다. "언제 한 번 내려와야지". 좀처럼 짬이 나지 않던 환절기를 흘러 보내고 있던 2018년이었다. 대문 앞에 도착한 것은 과수원 한 모퉁이에서 캐 올..
양고기 스튜 겨울의 양고기 스튜 내추럴 와인 을 곁들인 페어링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해 갈무리 해 둔 비황 작물과 겨울철 한기를 피해 땅 속의 양분을 한껏 품은 제철 뿌리채소를 뜨거운 솥에 끓인 스튜는 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는 위로의 묘약입니다. 물론, 좋아하는 고기와 건조한 태양빛에 말려둔 허브를 스튜에 녹이는 건 각자의 비법이겠지만요. 아! 여기서 저만의 비법을 얘기하자면, 완성된 스튜와 함께 페어링 할 와인을 살짝 스튜에 넣어 끓이는 거예요. 가을에 한창 수확한 포도를 첨가해 졸여둔 글레이즈드 발사믹도 함께요 Lestignac의 와인은 내추럴 와인의 매력이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재배와 수확 과정에서 농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일 말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조하는 와이너리의 풍경은 왠지 오랜 풍속화를 떠..
미셸을 위한 시 아메리칸 숏헤어는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털이 짧은 고양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 고양이들의 역사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고-베스부치의 오해와 우연으로 빚어진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올 때 함께 데려온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에 도처에 존재하였을 고양이들이지만, 짧은 털을 가진 짙은 얼룩무늬의 고양이가 '아메리칸 숏헤어'라는 이름을 명명받기 까지는 대서양을 뚫고 수천 마일을 건너와 작은 네 발로 미지의 땅을 디딘 최초 아메리칸 숏헤어의 노고가 있을 것이다. 2011년 3월 즈음, 미셸은 세단을 타고 전 주인의 품에 안겨 이곳 한옥집으로 이사를 왔다. 화장실과 사료그릇으로 쓰던 락앤락 반찬통, 곰돌이가 그려진 물그릇, 그리고 두툼한 갈색 발수건 한 장을 갖고서(미셸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