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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포르노그라피

소만의 기록, 2020

 

 

 

밀과 보리가 자라는 풍경, 2020, 소만 @KIM_ZINHO

 

지난해 이맘때 무렵, 나의 시간은 파리와 겐트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플랑드르의 풍경 속에서, 금호 강변의 흐드러진 들풀과 보릿고개를 조롱하며 하나둘씩 영글어가는 온갖 것들이 그리웠다.

 

 

 

 보리밭의 간극, 2020년 소만

 꼬박 일 년을 기다린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밤, 하늘에서 별이 쏟아졌고 희미한 별무리 서너 개는 지평선까지 내려와 꽃이 진 복숭아 밭 잎새에 걸렸다. 다음날, 모든 것이 차오르기 시작한다는 소만이 시작되었고 유례없는 에메랄드 빛 하늘 사이로 조각구름이 춤을 췄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는 새벽에서 황혼까지 고된 노동을 이어가는 인간의 땀방울이 서려있다. 아버지는 사나흘 설익은 포도씨를 추려내고 나면, 한동안 흰쌀밥이 초록 알갱이로 보인다고 할 정도다. 

 

푸른 밀과 붉게 영근 보리밭의 속삭임, 2020년, 소만

 

 

이 땅에 묻힌 거대한 뿌리를 밟고 선 2020년, 소만의 기록.

 

 

 

 

사과밭의 파수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