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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포르노그라피

체리를 얹은 티라미수

 

 

두 해 전 아버지는 과수원 한 귀퉁이에 심심풀이 과실수를 심었다. 살구, 자두, 아로니아, 체리, 호두나무 각 한 그루씩. 이듬해, 여름의 문턱에서 결실을 맺은 살구 속으로 발그레한 여름이 가득 차 있었고 늦가을 열매를 맺은 추희는 겨우 서너 개가 달렸다나. 그 어떤 성분이 눈에 좋다며 유행 따라 심은 아로니아는 무섭게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지만 떫은맛 탓에 찬밥 신세다.

 

게 중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한 체리 묘목은 꼬박 3년 만에 탐스러운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지 무렵 제철을 맞은 체리를 맛 보여 주고 싶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왔다. "언제 한 번 내려와야지". 좀처럼 짬이 나지 않던 환절기를 흘러 보내고 있던 2018년이었다. 대문 앞에 도착한 것은 과수원 한 모퉁이에서 캐 올린 감자 한 박스. 흙내 나는 하지 감자 틈새로 붉은 체리 한 봉지가 고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첫 수확한 체리를 맛 보이고 싶어 키친타월에 돌돌 만 채 김치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던 바로 그 체리. 딸자식이 어쩐 일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감자 틈바구니 사이로 올려 보내는 정성이란. 아버지의 사랑이 알알이 맺힌 체리 한 바구니를 받아 든 여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체리를 위한 요리가 번뜩 떠올랐다. 요리 라기보다 체리를 위한 오마주에 가깝다고나 할까. 마스카포네 치즈, 생크림, 카스텔라와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코코아 파우더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이탈리아의 국민 디저트 티라미수. Tiramisu는 이탈리아어로 '나를 끌어올린다'라는 뜻이다. 티라미스 한 스푼에 의례히 기분이 좋아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

 

 

 

 

사실 티라미수를 떠올린 건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의 경험에서다. 주방에서 어깨너머로 셰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 또한 작은 유희였기 때문이다. 당시 나에게 식재료와 레시피 따위의 디테일은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기억에 남은 건 하나의 커다란 미장센이다. 스펀지 케이크에 브러시로 커피를 펴 바른다거나, 미색의 마스카포네 치즈 위로 채에 걸러 곱게 내려앉은 코코아 파우더라던가.  

 

 

디저트는 계량과 레시피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되는 요리다. 그러나 티라미수의 경우, 어느 정도 예외가 허용된다. 생크림과 설탕, 마스카포네 치즈의 비율을 기호에 따라 배분하면 된다. 생크림의 비율이 늘어나면 조금 가벼운 식감의 크림이 형성되고, 마스카포네 치즈의 함량이 많아지면 훨씬 부드러워진다. 설탕으로 맞추는 당도는 그야말로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그만큼 티라미수는 '홈메이드 Home-made'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디저트이기도 하다.

 

 

 

코코아 파우더가 없는 티라미수는 뭐랄까, 미완의 마스터피스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오롯한 체리 한 쌍을 얹어 '체리를 위한 오마주' 완성.

 

체리를 위한 오마주, 2019, 여름 _ 스틸라이프

 

층층이 쌓인 티라미수를 한 스푼 끌어올려 곁들인 체리와 함께 사랑의 맛을 음미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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