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포르노그라피

서울, 종로

 

 

종로는 김수영 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찬란한 도읍의 중심, 광화문에서 사대문의 동녘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흥인지문에  이르기까지의 바로 그 거리. 그는 시 '거대한 뿌리'에서 서울에서 나고 자라며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뿌리로  형상화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은 시인 만의 자조적이며 냉소적인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수한  반동분자'들이 활개 치는 서울의 모습이었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와 같은  반동분자들은 더 이상 이 거리 속에 없다. 그들이 활보하던 광화문 앞으로 펼쳐진 육조六曺 거리는 지하 속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서울의 중추라고도 할 수 있는 광화문은 조선 왕조의 서막을 연 개국 공신 정도전이 성리학적인 명분을 바탕으로 야심 차게 계획한 도읍지의 정문正門이다. 전란으로 인해 전소되거나 일부가 유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광화문만이 갖고 있는 그 거대한 상징성은 끊이지 않고 재건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 시기 식민 통치의 속국이 되어 인내해야만 했던 피지배의 흔적은 바로 서 있어야 할 정도전의 광화문을 본래의 자리에서 비켜서게 했다. 그 원형을 복원하고자 해체와 철거 작업을 거쳐 2010년이 되어서야 제 자리를 찾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에 이른 광화문. 

 

 광화문 전야로 펼쳐진 거리에는 더 이상 비가 오면 질척이는 진흙탕도, 샛길 사이로 창궐하던 전염병과 악취 따위도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이 땅에 박고 있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시커먼 가지의 거대한 뿌리는, 일 순간 일상을 덮쳐 온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우연히 고궁을 스쳐가며  인왕산과 광화문의 돌담 그리고 해태 조각상이 문득  오버랩되자 오랜 도읍지의 영적인 기운이 밀려온다. 비록 광화문과 조각상의 오랜 역사를  집어삼킨 아우라는 사라지고 없다만, 그러하기 때문에 몰락한 왕조의 비애 또한 쉽사리 전해오지는 않는 듯하다.

 

고궁은 그저 낯선 관광객들의 기념촬영 장소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조선을 호령했던 도성 중심부의 위엄은 물론이며 난세 속에서 마음 둘 곳 없는 무명인 들을 끝내 외면한 왕조의 비극 또한 단지 역사의 메마른 기록일 뿐인가 싶다.

 

 

 광화문 일대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시인의 어찌할 수 없는 인간애가 투영된  '무수한  반동분자'들은 띄지 않는다. 그리 광활하지도 않은 사대문을 경계로 아우르는 지역 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이 아담한 공간 속에 녹아 있는, 시커먼 뿌리를 움켜쥔 서울을 마주하고 싶다.

 

 천년 도성의 고풍스러운 역사와 도심 속 민중 들의 군상이 뒤섞여 서울스러움을 자아내는 곳, 동묘 앞. 이곳에서는 서울의 민낯이 어디 하나 감출 구석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인다.  

 

 중국풍의 건축 양식과 우리 고유의 건축 요소가 혼재된 사당의 분위기는 사뭇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200년은 거뜬히 넘은 향나무가 관우의 수호령인 것 마냥 영적인 기운을 풍기며 사당의 양 측을 지지하고 있다. 

 

 

 

 

 동묘는 촉한의 명장인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큰 나라를 섬겨야만 했던 조선의 왕들과 신격화된 관우상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고서에는 동대문 일대를 '낙산' 밑의 '동촌'이라 구분 지어 주로 서민들이 거주하며 터를 조성해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으로는 조선시대 포목 옷감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성행하면서 배오개 시장이라는 사상 난전이 생겨 났는데, 그 흐름은 이 지역의 민중적인 성격과 맞물리며 다양한 길거리 시장을 파생시켜 왔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인해 난개발이 횡행하던 시절의 어수선함과 다이내믹함은 사그라진 듯 하나, 저곳에서 사라지면 어느새 이곳에 펼쳐지는 민중들의 생명력은 섣불리 제어할 수가 없다.

 

 

  동관왕묘 사당 돌 담벼락 주변으로 즐비한 좌판에는 시계방에  맡겨진 채로 주인을 잃은 낡은 손목시계부터 시작해 재활용 의류함에서 수거된 구제 옷가지들, 오래된 식기와 주방용품, 유행에  저만치 비켜선 가전제품 등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다.

 

간혹,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은 우연히 가치 있는 고가의 유물을 헐값에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차 있는데, 그러기에는 이미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정보를 공유해 버렸다. 대부분의 구매층은 구제 옷을 싼값에 찾는 알뜰족 이거나 재고정리로 인해 공장에서 헐값에 나온 생활용품을 사러 온 사람들.  

 

 구도심지의 축축한 측면-범람하는 청계천-이라는 풍수 탓일까, 단지 기분 때문일까, 동묘 앞은  잡동사니를 판매하러 나온 상인들로 북적이지만 기운찬 생동감이나 활기 가득한 생의 기쁨을 느끼기에 다소 칙칙하다는 단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동묘 앞 난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파들은 대부분 하릴없이 구경거리를 찾아 나온 나이 든 사람이 대부분이다.

 범상한 자라면, 얼핏 보아 그 가치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골동품에 메겨진 가격은 언제나 아리송하다. 해학적인 노인의 표정? 심혈을 기울인 듯한 양각? 웃고는 있지만 왠지 슬퍼 보이는 조각상은 동묘 앞의 분위기와 묘하게 닮아 있다.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일으키는 오래된 물건들. 정말로, 시인의 말마따나 '놋주발 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러하다'.  허나 잠시 동안이나마 감정이 소용돌이 칠 뿐, 지나치고 나면 그 의미도 희석되고 만다.

 길거리에 좌판을 편 노점상들은 6시를 전후로 짐을 정리해 자리를 떠난다. 그렇게 난전이 파하고 난 뒤, 서서히 어둠이 내리면 밤의 세계는 이방인들의 거리로 화한다.  바로 네팔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로 거리가 가득 찬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들은 이 지역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동묘 앞 골목 구석구석으로는 자연스럽게 네팔 음식점들과 잡화점들이 형성되어 있다. 낮에는 부산스러운 시내의 분위기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는데, 어둠이 잦아든 뒤 이 일대를 지나갈 일이 생긴다면, 여행을 떠나온 듯한 이색적인 경험 또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김수영 시인의 '인경전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의 모습 대신 어둠이 내린 뒤, 어스름한 밤의 기운에 기대어 거리로 나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을 뿐이지만, 바로 이어지는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라는 구절에서 처럼 아직도 잔존하고 있을, 그 '무수한 반동'의 '시커먼' '거대한 뿌리'를 휘감고 있는 '더러운  전통'과 '더러운 역사'를 상상해 본다.

 

다시 광화문 사거리로 돌아와 보니 제법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구문의 진창'과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은 너무도 오래되어 사라져 버린 신화 속 이야기 인 것만 같다.  

 

 

'일상 포르노그라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고기 스튜  (0) 2020.01.13
미셸을 위한 시  (0) 2019.12.27
하지, 여름에 이르다  (0) 2019.12.27
꼬망  (0) 2016.10.04
아보카도 새우 부르스케타  (0) 201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