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 이사하겠다고 결심하셨을 때 주변의 권유가 있었다고 책에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권유들이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당시 알고 지내던 인생 멘토가 있었어요. 그분 또한 아파트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도시 생활자였습니다. 그러다 아이의 건강 문제로 인왕산 아래 계곡과 숲이 우거진 빌라로 이사를 오게 되었어요. 이후, 라이프스타일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결국은 스러지기 직전 주택으로 터전을 옮기시더라고요. 그 집은 서울에서 가장 멋진 집이 되었어요. 살면서 손수 고쳐 나간 덕분에요. 삶이 확장되어 가는 일련의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남편과 저에겐 그분의 생활 방식이 귀감이 되었죠. 때마침 빈 한옥집이 나왔을 때 고민하는 남편을 질책하시더라고요. 자신은 한옥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면서요. 결혼 전의 남편과 저는 서로 1인 가구에 최적화된 원룸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선 듯 찾아온 기회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거죠. 세월을 머금고 삶의 지혜를 체화한 멘토의 한마디는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권유였던 셈입니다.
-절기를 목차로 나눈 것이나 전통혼례 에피소드 등을 보면 작가님께서는 한국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그런 문화가 몸에 배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계기로 전통적인 문화를 가까이 두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경상북도의 한 집성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조선 초중기 무렵 형성된 인동 장 씨 집성촌이에요. 15세기에 지어진 종가 고택의 사랑채와 조상의 신주가 모셔진 사당을 맨발로 뛰어다니면서 숨바꼭질을 하고, 설날이나 추석이 오면 동성의 친인척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구경했어요. 슈퍼마켓, 오락실도 없고 놀거리라고는 500년이 훌쩍 넘은 고목을 올라타거나, 재미없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졸거나, 동네 강아지를 쫓아 둑방길 따라 배회하는 게 전부였죠. 뒷산에서 마주친 토끼와 고라니에 일상성이 전복될 정도로 권태로운 풍경이었습니다. 이상의 단편 소설 <권태>에 묘사된 풍경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후 학업을 위해 줄곧 소도시에 머무르며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됐어요. 저는 학교에서 한국 예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책을 통해 배우는 내용이 결국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억과 맞닿아 있는 거예요. 전통문화란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치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건 대상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 낯설게 바라보지 못한 까닭이었던 거죠. 작은 깨우침 뒤에 어린 시절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접해온 일상 속 사물과 정서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더 이상 권태롭거나 너저분한 게 아니었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서 현대식으로 재창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예요. 그러나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일상 속에서 우리 문화의 가치를 녹이고 싶었어요. 그 자양분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입니다. 졸면서 들었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할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 소급되기도 해요. 그게 언제 적 일이에요. 18세기,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정말이지 김수영 시인이 이야기한 ‘시커먼 거대한 뿌리’가 손에 잡힐 것만 같다니까요.
-을지로, 익선동, 서촌 등 한옥을 있는 그대로 활용한 지역이 그 어느 때보다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옥에 주거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좋은 점 한 가지와 가장 나쁜 점 한 가지씩 꼽는다면 어떤 점들이 있나요?
좋은 점은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준다는 점입니다. 여름이 오면 무더위에 노출된 몸은 자연스럽게 땀을 흘리고, 겨울이 오면 건조한 살결은 갈라지고 트기 시작해요. 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계절을 감각하죠. 오늘 아침에는 문득 낮아진 태양의 고도가 그려내는 빛이 집안 깊숙이 침투하는 것을 보고 겨울이 왔음을 실감했죠. 계절과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다 보면, 서두르지 않게 돼요. 계절이 순환하는 원리를 어렴풋이 알고 있으니까요.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은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줍니다. 중심을 잡고 삶을 이끌어가는 자양분인 셈이죠.
나쁜 점은 그 자연스러움을 방어막 없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장마철 지붕 배수로를 조금만 방치해도 비가 새며, 한겨울에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위에 노출되죠. 건축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가고 있는데 말이에요. 아직은 내성과 타성이 생겨 그럭저럭 잘 버텨내고 있지만, 한옥 생활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지만요. 앞으로의 한옥은 봄, 가을 별장의 개념으로 명맥을 이어가지 않을까요.
-모든 게 갖춰진 새 집보다 하나씩 모습을 바꾸고 고쳐갈 수 있는 집에 사는 것에 장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스스로 공간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화 이전 우리 사회는 일터와 집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집이 일터이자, 일터가 집이었죠. 한 집안의 가장은 집을 스스로 짓고 한평생 손수 집을 고치며 가꾸고 살았습니다. 잘 지은 집은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도 했고요. 그러다 근대화 이후 생활 방식이 급변함에 따라 본래의 집이 갖고 있던 다양성이 제거되고 안식처로써의 개념만이 남게 되었죠.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씻고 휴식을 취하고 잠을 청하는 공간으로 최적화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삶의 다양성과 개성이 표출되기는 어렵죠. 반면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집에서는 언제든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어 하잖아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스스로 방을 꾸미는 인테리어 열풍도 이러한 욕구의 표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주어진 공간 그대로를 활용해 가구의 배치를 달리한다거나, 조명을 바꿔 단다거나, 소품을 놓는 정도로 시작하게 될 거예요. 그러다 공간 전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고 나아가 마당이나 정원, 주변 환경까지 영역이 확장될 거예요. 그렇게 스스로의 세계를 넓혀가다 보면 어느덧 한 뼘 성장한 또 다른 나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죠. 저는 공간이 인간의 삶의 행태를 규정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환경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저희의 다음 목표는 직접 집을 짓고 사는 거예요.
-누구나 쉽게 한옥 라이프를 즐기기는 쉽지 않죠. 한옥이 지닌 문화, 분위기, 전통적 공간이 주는 아늑함 등 비교적 현대적 공간인 아파트나 빌라에 주거하는 독자들이 한옥을 간접적으로(실내 소품이나 간단한 인테리어 변화 등)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한옥은 돌과 흙 그리고 나무로 지어진 집입니다. 그 소재를 가공한 오브제를 곁에 두는 것 만으로 한옥의 미학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무로 만들어진 소반이라던가,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활용할 수 있겠네요. 또한 한옥은 근본적으로 좌식 생활에 최적화된 공간입니다. 한지를 켜켜이 깔고 콩기름을 발라 바닥재를 완성시켰죠. 대청에는 나무를 깔았고요. 이러한 바닥재를 현대식으로 활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작가님께 '지속 가능한 삶'의 가장 큰 척도,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입니다. 바꿔 말하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를 찾고 그것을 하나씩 채워 나가는 것이 삶을 지속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그 요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삶의 단계를 충직하게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그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는 거예요. 그때 과거의 나와 한 뼘 성장한 현재의 내가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현재가 흘러가면 과거가 되고, 미래가 다가오면 현재가 되며 과거의 이야기도 결국 미래였듯이요.
-공간과 인테리어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주로 찾는 잡지나 사이트, 서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잡지 : Milk Decoration Magazine
프랑스 동부 샹파뇽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내추럴 와인 생산자 인터뷰 취재에 동행하게 되었을 때였어요. 생산자는 오래된 성을 개조한 부티크 호텔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인테리어가 매우 멋졌어요. 프런트, 살롱, 레스토랑, 객실이 각각 다른 콘셉트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잡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으로 말이에요. 그때 프런트에서 프랑스어로 쓰인 잡지 한 권을 발견했는데 <Milk Decoration>이라고 적혀있었어요. 앉은자리에서 잡지를 보니 알겠더라고요. 호텔 주인이 잡지책에서 영감을 얼마나 받았는지 말이에요. 프랑스의 전통문화와 현재가 조화를 이룬 인테리어 잡지입니다.
사이트 : 에어비앤비
전 세계 각국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당장 여행지에서 묵을 집을 찾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한 번 씩 가상의 목적지를 설정해 두고 집을 둘러보는 것 만으로 영감을 얻을 수 있어요. 단순히 인테리어뿐 아니라, 그 지역의 주거 문화, 나아가 역사까지 살펴볼 수가 있거든요.
서적 : <캐빈 폰, Cabin Porn>
국내 번역본이 출간되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책입니다. “나부, 바람, 흙 그리고 따뜻한 나의 집”이라는 부제가 책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네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을 갈망합니다. 그 욕망을 한 껏 드러내 보이는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첨단을 달리는 도시 생활에서 결국 영감과 아이디어의 원천은 자연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께도 한옥에 살기 이전에 '버티거나 떠나는 시절'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 같아요. 그때의 기억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복합 문화 공간 레지던시에서 몇 년간 일을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낮에는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고, 밤이 되면 예약이 되지 않은 레지던시의 빈 방을 전전하며 지냈죠. 언제 방을 옮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유욕이 사라지더라고요.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갈색 종이 가방 하나에 전부 들어갈 정도였으니까요. 무언가를 소유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라이프스타일이 굉장히 단순했어요. 덕분에 정서적 동요가 심했던 20대 후반의 시기를 잘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수도사가 무소유를 수행하는 일환으로 불시에 방을 옮겨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얘기하는 미니멀 라이프가 극대화된 케이스라고 보면 되죠.
-작가님의 집을 제외하고 요즘 서울에서 가장 자주 드나들고 사랑하는 공간이 있으신가요?
저희의 또 다른 작업 공간인 스튜디오로 가는 길목의 세검정입니다. 연산군을 폐위하기 위한 인조반정 때, 반정 세력이 개울가에서 칼을 씻은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과거 세검정으로 가기 위해 창의문을 통과해야만 했죠. 지금은 터널이 뚫려 손쉽게 오가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제한 구역이었습니다. 조선의 궁궐이 왕가의 공공연한 사유지였다면, 창의문 북쪽 땅은 왕가의 은밀한 사유지였던 셈이죠. 세검정을 지나 인근 백사실 계곡을 산책하다 보면 지금은 터만 남은 ‘백석동천’이 나옵니다. 조선의 문인들이 자연 속에서 사색을 즐긴 공간이었죠. 과거의 영광이 폐허로 변한, 텅 빈 공간이 건네는 속삭임은 황홀합니다. 상상력이 증폭되며 영감을 불러일으키죠. 비밀의 정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곳곳에 인용한 문학 작품, 문학가의 말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근 보기 시작한 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려요.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Pascal Quignard <부테스 Boutes>입니다. 부테스는 신화 속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본능에 충실했기에 비극을 맞이한 소외된 인물이죠. 작가는 신화 속의 잊혀진 인물을 소생시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본질의 개념을 전복시킵니다. 작가만의 아름다운 언어로요. 최초의 세계, 인간 본연의 심연에 대해 속삭입니다.
-소설을 쓰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소설 얘기도 간략하게 들어볼 수 있을지요.
윤달이 든 한 달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예요. 별다른 욕망이나 아무런 감흥이 없는 일상을 살아가던 젊은이가 고양이를 곁에 두고 난 뒤, 누운 채로 바닥에 붙어 사라져 가는 스토리죠. ‘욕망 없는 세대를 향해 던지는 그로테스크한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윤달은 ‘우주 만물의 체계 속에 포함되지 않는 달’ ‘인간의 실수를 눈감아 주는 좋은 달’ 등의 개념이 있다는 점에 착안했어요. 고양이를 처음 키우며 느끼게 되었던 감정을 빗대어 녹이려 했고요. 사실은 젊은 날의 저의 또 다른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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